<이원호 경제톡> 부메랑된 엔저(低)

엔화 낮췄지만 수출 안 늘고, 원자재 가격 폭등으로 직격탄
무역수지에 이어 경상수지 적자 돌아서 선진국 탈락 위기감?
일본과 유사한 경제구조 가진 우리나라 반면교사로 삼아야?
2022-05-16 15:04:14

거품경제가 붕괴된 후 소위 ‘잃어버린 30년’이라는 장기 침체에 허덕이던 일본 경제가 최근 들어 또 다른 위기 국면을 맞고 있다. 그동안 일본 경제의 버팀목 역할을 해 온 대외 부문이 지난해부터 크게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2021회계연도(2021년4월~2022년3월)에 일본은 51조원의 무역수지 적자를 나타냈다. 이는 2014년(약 90조원) 이후 7년 만에 최대치고 역대 4번째의 대규모 적자로 기록되고 있다. 이어서 올해는 경상수지마저 적자로 돌아설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日本??新聞)의 시뮬레이션 결과에 따르면 올해 엔/달러 환율이 116엔, 원유 가격이 배럴당 105달러일 경우 2022회계연도 경상수지 적자는 약 85조원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일본에서 마지막으로 기록한 경상수지 적자는 2차 오일쇼크의 발생한 1980년인데 현재 상황을 살펴보면 42년 만에 적자가 재현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엔/달러 환율은 지난달 한때 심리적 저항선으로 여겨지던 130엔을 돌파하는 등 약세가 지속되고 있다, 유가 또한 100달러대를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다. 5월10일 기준 두바이유는 100.4달러를 기록하는 등 고공행진을 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된다면 일본의 2022년 경상수지 적자는 니혼게이자이신문이 전망하는 85조원을 훌쩍 넘어 100조원 이상을 낼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한다. 실제로 일본의 경상수지는 지난해 12월과 올해 1월 각각 3조7000억원, 12조원의 적자를 기록해 갈수록 커지는 상황이다.

사실 일본의 무역수지 적자는 국내외 환경 변화나 천재지변 등의 원인으로 일시적인 발생할 수 있다. 반면 엔고(高) 시절 해외투자로 활발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들이 벌어들이는 수익으로 인해 상품수지 외 서비스수지, 본원소득수지, 이전소득수지가 포함된 경상수지는 항상 흑자 기조를 유지해 왔다. 따라서 한때 해외 투자 대국이었던 일본이 경상수지에서도 적자로 돌아선다는 것은 심각한 사안으로 받아들여진다. 특히 엔저 상황에서 발생한 무역수지와 경상수지 악화는 일본 경제가 구조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엔저가 지속된다면 일본 기업의 가격경쟁력이 올라가 수출이 증가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런 점을 고려해 일본 정부도 수출 확대를 위해 의도적으로 엔화 약세를 허용해 왔다. 하지만 엔화 약세가 결코 일본 경제와 기업에게 우호적인 방향으로만 흘러가지는 않았다. ‘잃어버린 30년’ 동안 일본 기업의 경쟁력이 떨어진 데다 일본 제조업체의 해외 진출 확대로 엔저를 통한 수출 증대 효과는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더욱이 우크라이나 사태로 원유를 포함한 국제 원자재 가격의 폭등은 엔저 정책을 고수한 일본에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아베노믹스로 대표되는 엔화 가치를 낮춰 수출기업의 경쟁력을 높이고 소득과 소비를 늘려 경제를 성장시킨다는 일본의 경제 정책은 위기에 봉착했다. 엔저가 일본 경제를 흔드는 메카니즘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엔저에도 불구하고 수출 증대 효과가 미미하면서 기업의 채산성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일본 경제는 오랜 기간 디플레이션 경제 구조가 고착화되어 수입물가 상승분을 가격에 충분히 반영할 수 없게 되었고, 임금 상승 또한 더디게 진행되었다. 이에 따라 생산자와 소비자 물가 차이가 커지면서 일본 기업들의 이익은 또 다시 줄어들게 되고, 이는 결국 글로벌 경쟁력 약화를 초래하는 악순환을 반복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일본 정부의 정책적 실패는 이미 예견되었다. 1970~80년대 해외시장에서 일본 기업의 경쟁 상대는 미국, 유럽과 같은 선진국이었다. 당시 엔화 약세는 선진국 제품에 비해 가격 경쟁력을 가져 수출 증대 효과가 있었고 성장에 기여하는 바가 컸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일본 기업의 경쟁 상대는 한국, 중국과 같은 국가의 신흥 기업으로 바뀌었다. 이들 기업은 충분한 가격 경쟁력을 갖추고 해외 시장에 진출했기 때문에 일본 기업들이 과거와 같이 충분히 엔저 효과를 누릴 수 없었다. 결국 일본 정부가 추진한 엔화 약세가 성장에 기여하지 못하고 오히려 구조적 위기를 초래하는 이른바 ‘나쁜 엔저’로 작용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최근 들어 일본 정부와 기업에서도 ‘나쁜 엔저’를 인정하는 분위기가 고개를 들고 있다. 하지만 글로벌 인플레이션으로 각국 정부가 금리 인상 카드를 꺼내들고 있는 마당에 일본은 여전히 ‘나홀로 금융완화’ 정책을 고수하고 있어 엔저가 당분간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오랜 기간 저물가 체제에 길들여져 있고 변화에 익숙하지 않은 일본 경제가 나쁜 엔저라는 사실을 인지하고도 포기하지 못하는 ‘디플레이션의 함정’에 빠진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도 원화 약세가 지속되고 있다. 올해 들어 무역수지도 적자로 돌아서고 경상수지 또한 흑자폭이 줄어드는 등 일본과 비슷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우리나라와 유사한 경제구조를 가진 일본의 정책적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원호 비즈빅데이터연구소장(경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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