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80년대 ‘아시아의 네 마리 용(Four Asian Dragons)’이라는 용어가 널리 쓰였다. 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 등 아시아에 위치한 4개국이 이 시기에 경이로운 경제 성장을 이룩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서구에서는 ‘용(dragon)’ 대신 ‘호랑이(tiger)’를 사용하기도 하고, ‘네 마리의 작은 용(little dragons)’이라는 표현도 등장한다. 서구인의 눈에 호랑이가 아시아를 대표하는 동물이라는 생각에 붙여진 것이다. 또한 ‘작은 용’은 당시 세계 경제를 호령하던 일본의 성장 모델에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에 일본에 비해 이들 국가의 경제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이들 4개국은 과거 제국주의 시대 식민지 경험을 했으나 해방 후 고도의 경제적 성과를 이루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한 성장 과정에서 보여준 강력한 국가주도의 경제 정책(홍콩은 제외), 수출에 대한 집중도, 높은 교육열과 양질의 노동력, 높은 저축률 등이 성장의 바탕이 되었다는 점을 공유하기도 한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각국의 경제 규모는 차이가 있고 주변 환경도 다르다. 각국이 추구한 성장 방식과 전략도 상이하다.
가장 먼저 한국과 대만은 한 개의 국가를 형성할 정도의 국토와 인구를 가지고 있지만 홍콩과 싱가포르는 도시국가 형태를 띠고 있어 두 그룹을 수평 비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다음으로 홍콩과 싱가포르는 도시 국가라는 한계를 지정학적인 이점으로 극복해 금융 산업과 중계 무역 등을 통해 성장한 반면 한국과 대만은 제조업을 바탕으로 하는 성장 전략을 채택했다. 마지막으로 한국과 대만은 초기 자본 축적 과정부터 달랐기 때문에 성장 전략도 판이하다.
대만의 경우 성장 초기 국민당 정부가 중국 대륙으로부터 가져온 막대한 자금을 바탕으로 경쟁력 있는 중소기업을 육성하는 전략을 추구해 무난하게 성장했다. 반면 한국은 1969년대 1인당 GDP가 아시아와 아프리카 최빈국과 맞먹을 정도로 열악한 환경에 놓여있었다. 따라서 미국 원조와 외채에 의존한 중화학공업 육성하는 불균형 성장 정책을 채택해 단기간에 성과를 올리는 전략을 채택했다.
이처럼 상이한 성장 배경과 전략을 가지고 있지만 선진국의 경제 전문가들은 식민지에서 해방된 대부분의 국가가 성장 동력을 찾지 못하고 빈곤에 허덕일 때 경이로운 성장을 이룩한 국가들이 아시아의 일정한 지역에 몰려 있다는 점에 흥미를 느꼈다. 특히 20세기 이후 유일하게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진입한 일본이 이들 국가와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또한 경제개발 초기 단게에서 일본과 유사한 국가 주도의 발전 정책과 부존자원이 부족한 단점을 수출을 통해 극복한 사례를 들어 이들 4개국을 한데 묶어 ‘아시아적 성장(혹은 발전) 전략’으로 보려는 경향이 있었다.
물론 아시아적 성장 전략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있었다. 미국의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Paul Krugman)은 아시아 신흥공업국의 고속 성장은 국가 주도로 이루어지면서 “성장의 과실이 국민들에게 배분되지 않고 일부 기업들이 차지해 선진국 시장에 진출했다”고 말한다. 또한 그는 “이 과정에서 기술과 제도의 발전을 통한 생산성 향상 없이 노동과 자본 등 생산 요소의 투입에 의존한 것이어서 곧 한계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다. 실제로 1990년대 말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지역에서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크루그먼의 지적이 일부 사실로 나타나기도 했다.
아시아적 성장 전략의 한계가 드러나고 중국 경제가 급부상하기 시작한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네 마리 용’이라는 용어는 거의 사용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이들 지역에서 고도성장의 신화가 깨졌다고 해서 성장 자체가 멈춘 것은 아니다. 외환위기 이후 구조조정을 통해 사회·경제 체질을 개선하고 양적성장 대신 질적인 성장을 추구함으로써 오히려 선진국 진입을 앞당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스페인, 이탈리아와 같은 유럽의 중위권 국가들을 추월하기 시작했고, 한때 롤 모델이었던 일본마저 위협하는 수준으로 발전했다.
1990년 1인당 GDP 기준으로 홍콩과 싱가포르는 일본의 약 1/2, 대만은 약 1/3, 한국은 약 1/4 수준에 불과했다. 하지만 도시국가인 홍콩과 싱가포르는 오래 전에 이미 일본을 추월했고, 2021년 한국과 대만의 1인당 GDP는 각각 34801달러, 33775달러로 39340달러인 일본의 턱밑까지 추격하고 있다. 글로벌 기업 경쟁력 또한 일본과 대등하거나 오히려 앞서나가고 있다. 일본의 경제학자 노구치 유키오(野口悠紀雄)가 언론에 기고한 칼럼에 따르면 “일본 1위인 도요타 자동차의 기업 가치는 세계 39위로 2110억 달러인 반면, 대만의 TSMC는 세계 11위인 4339억 달러, 한국의 삼성전자는 2991억 달러로 세계 25위”라면서 일본이 뒤떨어지고 있음을 시인하고 있다.
최근 일본 경제가 정체되면서 한국과 대만에 추월당할지 모른다는 우려가 나오고, 대만의 1인당 GDP가 18년 만에 한국을 넘어설 것이라는 소식을 접하면서 오래 전에 회자된 ‘아시아의 네 마리 용’의 기억이 새롭게 떠오른다. 이 지역에서 신화는 끝났지만 성장과 발전의 역사는 계속 이어지고 있는 중이다.
이원호 비즈빅데이터연구소장(경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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