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의 대표적인 누각인 ‘희경루(喜慶樓)’가 최초 건립된 지 572년, 사라진 지 100여년 만에 중건됐다.
광주시는 20일 남구 구동 광주공원 인근 현장에서 중건 기념식을 거행했다.
희경루는 지난 2018년 전라도 정도(定都) 천년을 기념해 정면 5칸, 측면 4칸에 장대석 기단을 놓았고 누상주는 목재 원형 민흘림 기둥을, 누하주는 장주초석을 세웠다. 겹처마에 연등천정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올렸다. 처마는 주심에서 2.5m를 내밀었다. 규모는 부지면적 2378.3㎡, 연면적 460㎡, 건축면적 230㎡다. 여기에 소요된 사업비는 60억 원이다.
19세기까지 실존한 이 누각은 1450년(문종 원년) 군수 안철석이 고을 안에 관유(觀遊) 할만한 장소가 없는 것을 아쉽게 여겨 1년여 공사 끝에 예전에 무너진 공북루(拱北樓) 터에 동향으로 누각을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
희경루라는 이름에도 사연이 있다. 누각이 건립되기 20여 년 전인 1430년(세종 12년)에 읍민 노흥준이 당시 목사 신보안을 구타한 '강상(綱常)사건'으로 광주목(光州牧)에서 무진군(茂珍郡)이 강등됐다. 누각이 지어진 6월에 필문 이선제, 이개·황보인 등이 강등 20년이 된 것을 기회로 광주목으로 복구해 달라고 상소를 올려 문종의 허락을 받으면서 함께 기뻐하고 서로 축하하는 누정이라는 뜻을 쓰게 됐다.
조선 초기 문신 신숙주(1417~1475)가 희경루기(喜慶樓記)에서 ‘동방에서 제일가는 누각’이라고 표현했을 만큼 웅장한 규모였다.
하지만 희경루는 1866년(고종 3) 목사 안응수에 의해 한차례 중수를 거친 그 뒤에 사라졌다.구한말과 일제강점기, 1907년~1916년 사이 전국 읍성을 철거하는 일이 벌어졌는데 광주읍성도 헐리고 신작로가 개설되는 사정과 맞물려 그 흔적과 정확한 위치조차 찾을 수 없게 됐다.
광주시는 중건을 위해 동국대에 소장 중인 보물 제1879호 ‘희경루 방회도(榜會圖)’ 모습을 철저히 고증·재현하는데 역점을 뒀다.
희경루 방회도는 1546년(명종1) 과거시험(증광시)에 문무과에 합격한 광주목사 최응룡, 전라감사 강섬 등 동기생 5명이 1567년(선조즉위) 20년 만에 광주의 희경루에서 만나 방회를 갖고 제작한 기년작(紀年作) 계회도(契會圖)다.
여말선초에 창건된 남원 광한루, 밀양 영남루, 진주 촉석루, 청풍 한벽루, 삼척 죽서루 등 현존하는 우리나라 대표적 누정도 살폈다.
대상지는 추정 원위치인 광주우체국과 아시아문화 전당, 광주공원, 제일극장, 사직공원, 풍암제 등 6곳을 후보지 가운데 탁 트인 조망과 주위 경관과의 문제, 녹지와 조경시설이 가능한지 여부, 지가와 경제성 등을 두루 따져 광주공원 인근 교회 부지를 선정했다.
희경루의 원래 위치는 자료 대부분이 '광주목 관아, 객사의 북쪽'을 지목하고 있다. 단초가 되는 객사는 1879년, 1899년 각각 발간된 '광주읍지' 2개의 지도를 근거로 현재의 충장로 무등극장 일대로 추정되면서 그 북쪽에 있었다는 희경루는 광주충장로우체국 일원으로 좁혀지고 있다.
충장로 2가 광주충장로우체국은 광주에서 땅값이 가장 비싼 곳으로 공시가로 2022년 기준 ㎡당 1690만 원이었다.
결국 희경루 복원은 높은 땅값의 영향으로 제자리에 건립하지 못하고 광주공원 인근으로 장소를 옮겨 짓게되면서 복원이 아닌 중건에 그치는 아쉬움을 남기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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