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전경련 회장을 두고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자리도 아니고, 하기 싫다고 피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라는 말이 있었다. 지난 2002년 손병두 전 전경련 부회장이 어느 기자간담회에서 했던 말이다. 전경련 회장의 위상과 함께 기업인으로서 사회적 책임을 강조한 것으로 해석된다. 물론 지금은 아니고 전경련의 자부심이 대단했던 시절의 옛 이야기다.
전경련이 지난 50년간 재계의 맏형으로 우리 경제의 고도성장에 견인차 역할을 담당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힘들다. 하지만 지난 정부에서 국정 농단 파문의 중심에 서면서 전경련의 위상은 한순간에 몰락했다.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 등 핵심 회원사가 줄줄이 탈퇴하면서 조직의 규모는 쪼그라들었다. 현 정부는 지난 5년간 국정농단의 책임을 물어 대놓고 전경련을 무시했다. 계속되는 ‘패싱’으로 전경련은 있어도 없는 듯 겨우 명맥만 유지하는 수모를 겪었다.
전경련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된 데에는 일차적으로 조직 자체의 잘못이 크다. 전경련은 과거 최순실이 주도한 것으로 알려진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 설립을 위한 기금을 회원사에 강요했다. 보수단체인 ‘대한민국어버이연합’에도 음성적으로 지원한 사실도 드러났다. 우리나라를 대표하고 글로벌 시장에서도 이름 높은 굴지의 대기업들이 포함된 전통 있는 경제 단체가 한 개인의 국정농단에 힘없이 굴복했다는 사실에 국민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물론 전경련을 외면하기만 한 현 정부의 행동도 잘했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정부와 재계 사이에서 ‘불가근 불가원(不可近 不可遠·너무 가까이해도, 너무 멀리해도 안 된다)’의 원칙을 내세워 때로는 협조하고 때로는 대립하는 적절한 균형이 모두에게 도움이 된다는 의견도 많았다. 또한 전경련이 그동안 구축한 해외 네트워크는 국가 경쟁력의 일부인데, 이들을 활용하는 것 마저 깡그리 무시한 현 정부의 처사도 결코 바람직하지는 않다.
전경련의 가치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새 정부가 들어서면 다시 역할을 담당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다. 과거의 어두운 면을 지양하고 순기능을 되살린다면 우리 경제에 분명한 도움이 될 것이라 확신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최근 들어 전경련이 다시 전면에 나서기 위한 움직임이 조금씩 포착되고 있다. 지난 21일 인수위 측과 경제단체장들의 간담회가 있었는데, 이 자리에서 허창수 전경련 회장은 작심 발언을 쏟아 냈다. 이전에 움츠렸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전경련의 부활이 점쳐지는 대목이다.
이번 간담회는 장제원 당선인 비서실장과 교감한 권태신 전경련 부회장이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이를 두고 일부 경제단체에서는 불만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는 후문이다. 국민도 뜬금없는 전경련의 등장에 다소 의아해 하는 모습이다. 국정농단 사건으로 ‘적폐’로 지목돼 엎드리고 있다가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별다른 계기도 없이 불쑥 나서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지적이다. 특히 비선 조직을 사사로이 움직이다 사달이 난 전경련이 이번에도 과거의 행태를 반복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 아닌지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전경련이 그동안 쌓아온 노하우는 반드시 활용되어야 한다. 하지만 전경련이 우리 경제를 진정으로 생각하고 활동을 재개하기 위해서는 반성과 내부 개혁이 선행되어야 한다. 먼저 과거 잘못에 대한 뼈저린 반성의 목소리를 내어야 할 것이다. 현 정부에서는 별다른 행동을 안 하다가 차기 정부에 줄을 대려는 모습은 누가 봐도 떳떳하게 보이지 않는다. 다음으로 전경련을 이 지경까지 이르게 한 현 집행부는 과감하게 용퇴를 결정해야 한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라’고 하듯이 새로운 조직을 구축해 미래를 준비해야 할 것이다.
전경련의 힘은 과거의 영광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이전의 성과를 바탕으로 새 정부가 펼칠 경제 정책과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맞게 도약하는 것이 전경련이 앞으로 추구해야 할 진정한 가치라 생각된다.
이원호 비즈빅데이터연구소장(경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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