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호의 경제톡> 횡포에 가까운 美반도체 보조금 지급 기준?

‘이익 공유’와 함께 ‘기술 공유’ 강요로 딜레마
안 받으면 경쟁서 밀리고 받으면 中시장 위협
정부, 적극 나서 외교력과 협상력 발휘해야
2023-03-06 16:03:57

미국 상무부는 지난달 28일 반도체과학법(CHIPS Act)에 따른 보조금 지급 기준을 담은 지원 공고를 발표하고 보조금 신청을 받기 시작했다. 지난해 8월 반도체 산업에 대한 527억 달러 규모 재정지원과 투자세액 공제 25%를 규정한 반도체지원법 발효의 후속 조치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보조금 지원 규모는 미국에 내 반도체 생산 시설에 투자하는 총 설비 금액의 5~15% 수준이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그런데 미 정부가 제시한 보조금 지급 기준이 여간 당혹스러운 것이 아니다. 투자 기업들 입장에서 보면 심한 압박을 받을 만한 독소 조항이 군데군데 눈에 띈다. 애초 반도체과학법 제정이 미국 내 반도체 제조업 부활과 중국을 견제하는 목적이 강했기 때문에 보조금 지급에 대한 반대급부가 어느 정도 예상은 되었지만, 이번 조치는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선을 넘었다는 지적이 나올 정도이다.

발표된 보조금 지급 기준에서 논란이 되는 조항은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먼저 ‘초과이익 환수(혹은 공유)’다. 이것은 보조금 신청 기업이 예상보다 많은 이익을 올리면 보조금의 최대 75%까지 환수하겠다는 것이다. 환수된 초과이익은 자국 내 반도체 생태계를 강화하는데 사용할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미국 정부는 미국인의 세금인 만큼 이 중에서 일부를 되돌려준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그동안 자유주의 시장경제를 전 세계에 전파해 왔던 미국이 사회주의에 가까운 정책을 꺼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다음으로 ‘국가 안보 지원’이다. 반도체가 미국의 국방 체계에 매우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에 미 국방부가 실험과 생산시설에 접근을 허용하는 기업을 우대하겠다는 것이다. 미국의 군사용 반도체 개발에 민간 기업을 적극 활용하겠다는 계획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보조금을 받는 기업들의 첨단 기술이 고스란히 미국 정부로 넘어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익 공유’보다 더 심각한 타격을 받을 ‘기술 공유’를 강요한다는 점에서 이것 역시 시장경제체제를 심하게 훼손시킬 우려가 있다.

마지막으로 ‘중국에 대한 신규 투자 금지’다. 이는 미국에서 보조금을 받게 되면 향후 10년간 중국 등 우려 국가에 반도체 시설 확장을 제한한다는 내용이다. 중국에 대규모 생산 시설을 운영하고 있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입장에서는 여간 곤혹스러운 일이 아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각각 낸드플래시의 약 40%, D램의 약 50%를 중국에서 생산하고 있다. 중국에 신규 투자를 못하게 된다면 우리 기업들은 매출액 감소와 더불어 대대적으로 사업을 재편해야하는 어려움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현재 삼성전자는 미국 텍사스주에 170억 달러를 투입해 파운드리 반도체 공장을 짓고 있으며며, SK하이닉스도 150억 달러 규모의 첨단 패키지 공장과 연구개발(R&D) 센터 건설을 계획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 기업들은 미국 내 대규모 투자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패권 유지’와 ‘중국 견제 정책’에 이용당하는 ‘을(乙)’의 위치에 서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보조금을 받지 않으면 반도체 경쟁에서 뒤처지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보조금을 받자니 기업 기밀 유출과 최대 시장인 중국 사업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하는 딜레마에 빠진 것이다.

우리 정부는 이에 대해 뾰족한 대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가드레일 세부 규정 마련 과정에서 우리 기업 입장이 충분히 반영될 수 있도록 앞으로도 미 관계당국과 계속 협의할 예정”이라는 원론적인 의견만 내놓고 있다. 하지만 반도체는 현재 우리나라의 주력 산업일 뿐만 아니라 미래 먹거리 산업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 우리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 외교력과 협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특히 기업의 영업 비밀과 첨단 기술이 유출되는 것은 세부 협상을 통해 반드시 막아야 한다. 반도체 원천 기술을 미국에 의존하고 있는 상황에서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제조·생산 노하우마저 미국에 내 준다면 향후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의 존립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 다음으로 중국 내 반도체 사업에 대한 보장을 받아내야 한다. 중국을 지나치게 고립하는 정책은 오히려 반발을 초래해 중국의 반도체 자립을 앞당길 수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 반도체 기업의 중국 사업이 미·중 갈등의 완충 작용을 하고 있다는 논리를 미국 정부에 적극적으로 전달해 관철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이원호 비즈빅데이터연구소장(경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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