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국민은행, 영화 ‘문을 여는 법’ 고객 초청 상영회 개최
2024-12-17
<편집주>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공연들이 있다. 공연을 경험했던 시간이 일상 속 한 장면으로 자리하는 순간들이 있다. ‘공연일기’는 지난 공연의 여운을 돌아보며 공연이 가진 일상의 울림을 전한다.
지난 3일 계엄령이 있던 밤 ‘서랍에 넣어둔 저녁’⁎을 꺼내 들듯 머릿속에 남아있던 공연 하나를 꺼내 들었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 하자”던, 서정주의 시에 가수 송창식이 곡을 붙인, 노래 속 현실을 무대로 불러왔던 연극 ‘푸르른 날에’ 였다.
그날, 눈부시게 푸르렀던 청춘들의 목숨은 흩날리는 꽃잎처럼 가없이 떨어져 내렸다. 그날은 ‘용암처럼 흐르는 피의 강’으로 거리가 온통 피꽃으로 물든 ‘1980년 5월 어느 날’ 광주였다. 서로를 더없이 사랑하는, 보통의 연인에 불과했던 오민호와 윤정혜는 ‘한 집 건너 울지 않는 집이 없는’ 거리에서 이 ‘무섭고도 노골적인 학살의 밤’을⁎⁎ 목도하며 둘만의 평범한 일상을 영영 잃어버렸다.
살기 위해 동지들을 등진 민호는 모진 고문의 후유증과 홀로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을 안고 배부른 정혜마저 뒤로 한 채 스님이 되었다. 30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여태 ‘넘어진 곳에서 일어서지’ 못했던 민호는 딸의 혼사로 운명처럼 재회한 정혜 앞에서 ‘그날’의 기억들을 마주했다.
극의 시작은 멜로드라마였다. 주연은 “저 여자는 푸르른 날의 나, 윤정혜”와 “저기 저 남자는 푸르른 날의 나, 오민호”였고 주연들의 ‘그땐 그랬지’로 이어지는 이야기에 코믹한 대사와 과장된 행동을 더해 기민하게 객석의 긴장감을 늦췄다. 그런 연후에 차츰 이 보통의 인물들이 자신들의 ‘푸르른 날’을 어떻게 짓밟히게 되었는지, 왜 잃어버린 ‘푸르른 날’을 그리워할 수조차 없었는지에 대한 진실을 담담하게 그려냈다.
비수처럼 꽂히는 시대의 무게에 객석은 숙연했다. 그날의 이야기가 비단 역사 속 과거의 사건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의 빛바랜 일상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의 역사가 이어질 수 있었음을 몸소 느낄 수 있었던 까닭이었다. 내리는 꽃비 아래로 산 자와 죽은 자가 환한 웃음을 머금은 채 한 장의 사진으로 아로새겨졌던 엔딩이 눈부시도록 아름답고도 처연했다.
계엄 뉴스 특보로 세상이 뒤엎어진 요즘 자신만의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선 사람들의 얼굴 위로 연극 ‘푸르른 날에’의 장면들이 포개어지곤 한다. 마지막 커튼콜에서 금방이라도 울음을 쏟아낼 것만 같던 배우들의 얼굴이, 너나 할 것 없이 눈가를 훔치던 객석의 공기가, 공연 기념 엽서에 쓰여 있던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라는 글귀와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기립 박수까지도 선연하다. 그들의 이야기를 또다시 만나고 싶다.
연극 ‘푸르른 날에’는 2009년 제3회 차범석희곡상 수상작으로 선정된 정경진의 희곡을 연출가 고선웅이 각색, 연출해 2011년 5월 남산예술센터에서 첫 선을 보인 뒤 2012년부터 2015년까지 남산예술센터 정기 공연으로 무대에 올랐다.
⁎ 한강 작가의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시집 제목 인용
⁎⁎ 김남주 시인의 《나의 칼 나의 피》 중 〈학살2〉 일부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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