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호의 경제톡> 미국은 세계를 상대로 이길 수 있을까
2025-10-07
이 역설은 우연한 결과가 아니라 구조적인 변화와 맞물려 있는데, 변화의 첫 번째 요인은 품목 구조의 상향화다. AI 인프라 확장으로 HBM과 DDR5 같은 고부가 메모리 수요가 급증하면서 반도체가 가격과 물량을 동시에 끌어올렸다. 자동차도 친환경차와 내연기관차가 모두 호조를 보였고, 선박과 바이오헬스 등 고부가가치 분야가 뒤이었다.
반면 철강·석유화학 등 범용재는 글로벌 공급과잉과 가격 약세, 관세 민감도 탓에 부진했다. 수출이 가치사슬 상단으로 이동한 만큼, 고부가 중심의 ‘질적 재편’이 전체 수출을 견인했다.
둘째, 시장 포트폴리오의 신속한 회전이 충격을 흡수했다. 대미 수출이 관세 여건으로 주춤한 사이, 아세안과 EU, 중남미, CIS 등 비미국 지역에서 플러스를 기록하며 공백을 메웠다. EU는 자동차·선박·일반 기계가 고르게 확대되며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고, 대만향 반도체도 최고치를 경신했다. ‘대미 역풍—비미국권 순풍’이라는 상쇄 메커니즘이 작동했고, 한국 기업들은 빠르게 변화의 방향으로 움직였다.
셋째, 세계 물동량의 방향 전환이 우리나라에 우호적이었다. 관세는 발표 직후 단기 ‘밀어내기’와 시행 직후 급감이라는 비대칭적 타이밍 왜곡을 낳는다. 실제로 발표 직후 1주 물동량 급증, 시행 직후 1주 급감이라는 패턴이 관측되었다. 더 중요한 점은 보편관세 시행 이후 미국의 수입 증가가 둔화되는 동안, 글로벌 수출 물동량은 미국 외 지역을 중심으로 분산·확대되었다는 사실이다. 미국 관세의 벽이 새로운 교역 경로를 만들었고, 우리 기업들이 그 경로를 선점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우호적인 흐름이 앞으로 계속된다는 보장은 없다. 글로벌 교역 환경은 보호무역주의의 확산과 지정학적 불안, 수요 변동성, 기술 경쟁 심화 등 복합적 요인으로 인해 언제든지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미·중 갈등 장기화와 각국의 산업 보호 움직임은 새로운 무역 장벽을 만들고, 고금리와 경기 둔화는 소비 위축으로 이어지고 있다. 동시에 중국·미국·EU 등 주요국의 대규모 투자와 정부 지원으로 반도체·배터리·전기차 등 첨단 산업에서의 경쟁이 한층 치열해지며, 한국의 초격차 우위 역시 압박받고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단기적 성과에 만족하지 않고 ‘지속 가능한 수출 구조’를 정립하는 것이다. 즉, 기술 초격차를 유지하고, 시장과 품목을 다변화하며, 통상 리스크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삼중 전략이 요구된다. 이를 위해 우선 기술 경쟁력의 질적 심화가 중요하다. AI, 바이오헬스, 미래 모빌리티, 수소경제 등 미래 산업에서 독보적 기술력을 확보해야 한다. HBM·DDR5를 잇는 차세대 반도체, 친환경 선박, 혁신 신약 등에서 선제적이고 과감한 R&D 투자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기술력의 초격차는 관세 장벽이나 지역적 규제를 무력화하는 가장 강력한 보호막이기 때문이다.
또한 시장 다변화의 폭과 깊이를 함께 확장해야 한다. 아세안, 중남미, EU, 인도 등 성장 잠재력이 높은 지역과의 경제 협력을 강화하고, 현지 맞춤형 제품·서비스 개발로 시장 점유율을 높여야 한다. 동시에 글로벌 생산기지의 분산과 현지화를 통해 관세·물류·정책 리스크를 완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특정 국가나 지역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고, 다극화된 공급망 체계를 갖출 때 외부 충격에도 흔들리지 않는 수출 구조를 만들 수 있다.

마지막으로 통상 리스크에 대한 선제 대응 체계가 필수적이다. 급변하는 국제 통상 환경을 실시간으로 감지하는 조기경보 시스템을 강화하고, 정부와 기업이 함께 신속히 대응할 수 있는 민관 협의체를 상시 운영해야 한다. 특히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공급망 실사 의무화 등 새로운 비관세 장벽에 대비해 기업의 ESG 역량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이런 변화는 단순한 규제 대응이 아니라, 오히려 K-수출의 ‘지속가능 경쟁력’을 높이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이번 수출 신기록은 한국 산업이 빠르게 적응하고 구조를 바꿔낸 결과이지만, 세계 교역의 판도는 여전히 불안정하다. 기술 패권 경쟁과 보호무역, 지정학 리스크가 맞물리는 시대일수록 수출은 ‘버티는 전략’이 아니라 ‘진화하는 전략’으로 가야 한다. 초격차 기술력, 다변화된 시장 구조, ESG 기반의 지속가능성을 함께 갖출 때, 한국 수출은 단기 반등이 아니라 새로운 표준으로 자리 잡을 것이다.
이원호 비즈빅데이터연구소장(경제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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